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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물건

현재 사이즈에 맞는 옷을 입는다

by 천천히 스미는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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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즈 맞지 않는 옷은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살이 많이 쪘다. 생활의 변화와 노화 때문일까. 회사를 다니며 이건 평생입겠다고 다짐한 바지들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비싼 바지 였는데. 루즈하게 입는 바지들만이 어렵게 다리를 넣을 수 있었지만, 그 낙낙한 맛은 전혀 없었다. 바지안에 다리가 들어간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수준이었다.

살을 빼서 입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람들처럼. 난 왜 이 몸무게를 유지 못해서 이 비싼 옷들을 하나도 입지 못하는 가에 대해 자책했다.



사이즈가 안 맞는다고 버리기 아깝다면, 물어봐라.

하나씩 하나씩 취향에 맞는 바지를 모은 거였다. 사이즈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버리는 건 내 취향마저도 버리는 것만 같았다.

어느 유튜버가 말했다. 바지를 버릴지 말지 고민된다면 남편한테 물어보면 된다고 했다. 나는 사이즈가 맞지 않지만, 내 취향이어서 버리기 아까운 바지 더미를 들고 남편에게 갔다. 버릴지 말지 보고 판단해보라고.

첫번째, 30만원을 주고 산 밑단이 트인 슬랙스. 무릎까지 들어갔다. 허벅지는 올라가지도 않았다. 남편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 이건 좀 그렇지? 하하..



민망했다. 내가 봐도 민망했다. 살을 빼고 입겠다는 말이 머쓱했다.

재빠르게 두번째, 트위드 소재의 하이웨이스트 바지. 다리를 넣었는데. 자크가... 너무 불쌍할 정도로 무릎에서 이미 최대로 벌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남편을 쳐다보니, 역시 눈이 팔자가 된 상태로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내 옷을 물어보는 건데 왜 이렇게 눈치가 보이지. 나는 또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어때“ 물어보니,

놓아주자...



으응.. 나는 말끝을 흐렸다.

세번째 겨우 허벅지는 통과했으나, 엉덩이는 허용할 수 없었던 겨울 슬랙스. 네번째 스판이 있고 색이 딱 내가 원하는 푸른 계열의 청바지. 스판도 내 살을 포기했다. 다섯번째 옆 지퍼로 된 팥죽색 슬랙스는 자크가 말하는 것 같았다.

렛미고...



옷에 대한 사연은 끝도 없었다. 처음 내 마음에 쏙 들었던 그 순간, 자주 손이 갔던 그 순간. 그 속에 담긴 여러 추억이 떠올라 옷을 버리기 참 어려웠다. 게다가 난 하체가 튼튼해서 맞는 바지를 찾기가 더 어려웠고, 그래서 더 내 장롱안에 바지가 소중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입어보고 타인에게 보여주는 과정을 거치니 답이 나와있었다. 이젠 나와의 인연이 끝났구나.



옷은 항상 현재 사이즈에 맞춰 입는다.

옷이 끼면, 슬프다. 우울하다. 옷이 아니라 자기관리 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슬프기만 해서는 나한테 도움 되는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사람이 세월이 흐르면 체형이 바뀐다. 연예인들이나 인플루언서처럼 몸매를 유지하는 것 부럽다. 사이즈가 달라져서 옷을 사는 일은 없을테니까. 하지만 나는 연예인 처럼 보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다.

지하철을 타보면, 다양한 체형의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는 더 다양한 체형이 있다.

그 사람들 다 옷을 입고 있다.



나보다 체격이 있으면 옷이 끼는가? 아니다. 다 그들 체형에 맞는 옷을 입고 있다.

내가 아무리 살이 찌고 빠지는, 체형이 변해도 내가 입을 옷은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살이 찌면 그 체형에 어울리는 옷을 다시 사면 된다.

옷을 안사는게 환경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 체형을 유지하는 게 좋은 건 알지만,
이미 살이 찐 걸 어쩌겠는가.



나는 살이 쪄서 엉덩이의 팬티 자국이 그렇게 거슬렸다. 광고에서 겁 주는 미사어구가 막 떠올랐다. 디룩디룩 같은. 그런데 그럴 필요 없다. 내 사이즈에 맞는 바지를 다시 사면 된다.
  

내 사이즈를 받아들여라

나는 맞지 않는 모든 바지를 버리고, 고무줄로 된 슬랙스를 샀다. 편하고, 사이즈도 낙낙하고 맞는다. 그리고 살이 쪘다고 자책하는 일이 없어졌다.

고무줄 슬랙스를 살때 엉덩이 사이즈를 재보니 내가 생각하지 못할 인치가 나와 또 우울해졌었다. 라지도 안 맞아? 라는 생각에 슬펐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작은 사이즈를 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 어떡하는가. 작은 사이즈를 사면 더 자책하게 된다.
어짜피 한번에 입을 수 있는 바지는 하나 뿐이다. 사이즈 잘 맞춰 입어야 하루가 편하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내 삶에서 중요한 건 바지 사이즈가 아니다.


나는 XL사이즈를 클릭했다.


그리고 새로운 나만의 스타일이 생겼다.



오늘의 세줄 정리

  1.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은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2. 옷은 항상 현재 사이즈에 맞게 입는다
  3. 내 사이즈 받아들이기

 

P.S

남편에게 바지 버릴지 말지 물어볼 때, 연애시절 자주 입었던 낙낙한 핏의 연청색 청바지가 나왔다. 허리가 헐렁헐렁하여 편하게 입던 바지였다. 또 호기롭게 입었는데 배가 안 잠겼다.

배에 힘껏 힘을 줬더니 겨우 잠겼다. 자크는 잠겼지만, 튀어나온 배가 여실히 드러났다.

남편은 그래도 들어갔으니, 이 바지는 버리지 말자고 했다. 나는 수긍했다. 조금 아련해진 남편의 눈을 보았다.

아직 장롱에는 연청 청바지가 있다.

 

 

 

 

 

 

 

천천히 스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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